경제뉴탐사
재고는 넘치는데 기름값은 100달러…최고가격제가 못 막는 '전쟁값'
미국 원유 재고 5주 연속 증가에도 유가 40% 급등, 두바이유-WTI 격차 11년래 최대…한국만 비싼 기름 사는 구조
미국 원유 재고가 5주 연속 시장 예상을 뒤집고 증가했다. 공급 부족이 아니다.
WTI는 한 달 만에 40% 올라 100달러를 넘나든다. 전쟁 프리미엄이 배럴당 4~10달러 붙었다.
한국이 사는 두바이유와 미국 WTI의 격차가 11년 만에 최대다. 미국은 싸게 쓰고 비싸게 판다.
석유 최고가격제가 시행됐지만 주유소 평균은 여전히 리터당 1,829원이다. 상한선은 공급가에만 걸린다.
기준금리는 2.5%로 묶여 있고 주담대 금리는 4.26%로 올랐다. 유가가 금리인하를 막고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이 매주 발표하는 원유 재고 데이터가 시장의 상식을 뒤집고 있다. 3월 20일 마감 주간 기준, 미국 상업용 원유 재고는 692만6,000배럴 증가해 4억5,620만 배럴을 기록했다. 시장은 50만 배럴 감소를 예상했다. 정반대 방향으로, 예상치의 14배가 쌓였다.
5주 연속 빗나간 예측
이런 일이 한 주만 벌어진 게 아니다. EIA 주간 데이터를 보면 구조가 선명하다. 2월 28일 주간 재고는 382만 배럴 증가했다. 시장 예상은 110만 배럴이었다. 3월 6일 주간 382만4,000배럴 증가, 예상의 세 배를 넘겼다. 3월 13일 주간 616만 배럴이 쌓였고 시장은 40만 배럴을 봤다. 3월 20일 주간은 692만6,000배럴 증가, 예상은 오히려 50만 배럴 감소였다.

5주 동안 미국 원유 재고는 시장 예상치를 한 번도 빗나가지 않고 초과했다. 시장은 계속 "줄어들 것"이라 봤고, 현실은 계속 "늘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 WTI(서부 텍사스 중질유) 원유 가격은 한 달 전 대비 약 40% 올라 100달러선을 넘나들고 있다. 공급이 부족해서 오른 게 아니다.
전쟁값의 구조
한국투자증권은 3월 17일 리포트 "미국-이란 전쟁(3): WTI $100/BBL에 가려진 현실"에서 이 구조를 직접 짚었다. 핵심은 이것이다. "심리적 영향을 제외하면 미국·유럽은 실질적 원유 수급 차질이 사실상 없다." 유가를 끌어올리는 건 수급이 아니라 전쟁이다. 국제 분석가들이 추정하는 전쟁 프리미엄, 즉 전쟁 때문에 실제 가치보다 더 얹어지는 가격은 배럴당 4~10달러다. 네덜란드 ING는 이 프리미엄을 최대 10달러로 봤다(ING Think, 3월 분석).
한국이 직면한 현실은 여기서 한 겹 더 가혹하다. 국제 원유 가격에는 기준이 세 개 있다. 미국 시장의 WTI, 유럽 시장의 브렌트유, 중동 시장의 두바이유다. 한국은 원유의 약 70%를 중동에서 들여오며 두바이유 기준으로 수입한다. 두바이유는 브렌트유와 연동돼 움직인다. 3월 현재 브렌트유와 WTI의 가격 차이가 11년 만에 최대로 벌어졌고(한국경제 보도, 3월 19일), 두바이유도 이에 연동돼 WTI보다 훨씬 비싸다. 미국은 싼 WTI로 자국 시장을 방어하는데, 한국은 비싼 두바이유를 사야 한다는 뜻이다.
서울경제 보도(3월 25일)에 따르면 아시아 국가들은 달러 강세까지 겹치면서 체감 원유 가격이 더 높아지고 있다. 석유·가스 국제 거래의 90%는 달러로 이뤄진다. 원/달러 환율이 1,508원까지 오른 상황에서 같은 양의 원유를 사더라도 원화로는 더 내야 한다.
미국의 사정은 다르다. 미국은 자국 시장을 상대적으로 저렴한 WTI로 방어한다. 동시에 잉여 원유를 브렌트유 기준 국제 가격으로 수출해 차익을 챙긴다. 2026년 미국 원유 생산량은 하루 평균 1,360만 배럴로 전년 대비 늘었다. 재고도 쌓고, 생산도 늘리면서, 비싼 가격으로 판다. 한국은 원유 100%를 수입에 의존하면서 비싼 두바이유를 사야 한다.
이 구조는 주유소 가격에 그대로 드러난다. 미국자동차협회(AAA)에 따르면 미국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은 전쟁 전(2월 26일) 갤런당 2.98달러, 전쟁 한 달 뒤(3월 26일) 3.98달러로 약 34% 올랐다. 원화로 환산하면 리터당 약 1,190원에서 1,590원으로 뛰었다. 한국석유공사 오피넷에 따르면 같은 기간 한국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약 1,450원에서 1,900원대까지 약 30% 이상 급등했다. 상승률은 비슷하지만 절대 가격이 다르다. 전쟁 전에도 한국이 리터당 260원 더 비쌌고, 전쟁 뒤에는 그 격차가 300원 이상으로 벌어졌다. 최고가격제 시행 뒤 한국 가격이 1,829원까지 내려왔지만, 미국 평균(원화 환산 1,500원대)보다 여전히 300원가량 비싸다.
정부는 빠르게 움직였다, 그런데
이재명 정부의 대응 속도 자체는 빨랐다. 미·이란 전쟁 발발 사흘 뒤인 3월 5일 자원안보 위기경보를 발령했고, 3월 9일 비상경제점검회의에서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을 공식화했다. 3월 13일 29년 만에 최고가격제가 시행됐다. 3월 17일에는 위기경보를 '관심'에서 '주의'로 격상하고, 비축유 2,246만 배럴 방출 계획을 수립했다. 원전 가동률을 80%로 올리고, 석탄화력 발전 상한제를 폐지하고, 호르무즈 해협 우회 대체 물량 확보에도 나섰다. 시장안정 프로그램 규모를 100조원 이상으로 확대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추경안은 3월 말까지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대응의 속도와 의지는 확인됐다. 문제는 제도가 닿지 못하는 영역이다.
석유 최고가격제는 정유사가 주유소에 넘기는 공급가에만 상한선을 씌운다. 휘발유 리터당 1,724원, 경유 1,713원이다. 한국석유공사 오피넷에 따르면 3월 셋째 주 전국 주유소 휘발유 평균 판매가는 리터당 1,829원이다. 공급가 상한이 1,724원인데 소비자가 주유소에서 내는 돈은 1,829원이다. 서울과 수도권 일부 지역에서는 2,000원에 육박하는 주유소가 나오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최고가격제는 주유소 판매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정유사가 공급가를 낮추더라도 주유소가 자기 몫을 줄이지 않으면 소비자 가격은 내려가지 않는다. 공급가 인하가 판매가에 반영되기까지 3~4일이 걸린다는 게 업계 설명인데, WTI가 하루 만에 7% 급등하는 시장에서 3~4일의 시차는 크다. MBC 보도(3월 27일)에 따르면 최고가격제 시행 2주 만에 새 기준가격이 발표되면서 공급가 상한이 휘발유·경유 모두 리터당 210원씩 올랐다. 국제 유가가 계속 오르면 상한선 자체가 따라 올라가는 구조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최고가격제는 정유사의 국내 마진을 통제할 수 있지만, 국제 전쟁 프리미엄 자체를 낮추지는 못한다. 배럴당 4~10달러의 전쟁값은 한국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다. 국제 유가가 계속 오르면 정유사는 수입 원가보다 낮은 가격에 공급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그 차액을 정유사가 감수하는 것인지, 재정으로 보전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도가 유명무실해지는 것인지—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비축유 2,246만 배럴 방출도 규모를 따져봐야 한다. 한국의 일일 원유 소비량은 약 280만 배럴이다. 2,246만 배럴이면 약 8일치다. 단기 충격 완화에는 쓸 수 있지만, 전쟁이 6월까지 장기화될 경우를 대비하기에는 빠듯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검토 중인 회원국 공동 비축유 방출(최대 4억 배럴)에 한국이 얼마나 참여하고, 그 분담 규모가 어떻게 되는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기준금리는 묶여 있고, 대출이자는 오른다
유가가 100달러를 넘으면 한국 경제에 일어나는 일은 정해져 있다. 원유 수입 대금이 늘고, 달러 수요가 커지고, 원화가 약해진다. 원화가 약해지면 수입 물가가 오르고, 물가가 오르면 한국은행이 금리를 내리기 어려워진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2.5%로 6차례 연속 동결하고 있다. 한은이 3월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서 "물가는 대체로 목표 수준 근처에서 안정세"라고 적으면서도 "높아진 환율"을 경계한 이유다. 금리를 내려서 경기를 살리고 싶어도, 유가와 환율이 물가를 밀어올리는 상황에서는 내릴 수 없다.
기준금리가 묶여 있는데 대출금리는 오른다. 한은이 3월 27일 발표한 금융기관 가중평균금리 통계에 따르면 2월 예금은행 신규 대출금리는 연 4.26%로 전월 대비 0.02%포인트 올랐다. 기준금리 2.5%와의 격차가 1.76%포인트다. 한은이 정하는 기준금리와 시중은행이 매기는 대출금리는 다르다. 은행도 돈을 빌려서 대출을 해준다. 미국 금리가 오르면 한국 채권 금리도 따라 오르고, 은행이 돈을 빌리는 비용이 올라간다. 은행은 그 비용을 대출자에게 넘긴다.
2020~2021년에 집을 사면서 대출을 받은 사람들의 부담이 특히 커질 수 있다. 당시에는 금리가 낮아서 연 2%대 후반~3%로 돈을 빌렸다. 이 대출의 상당수는 처음 5년은 금리가 고정되고 그 뒤부터 시장 금리에 따라 변하는 구조다. 올해가 그 5년이 끝나는 시점이다. 고정 구간이 끝나면 지금의 변동금리가 적용된다. 연 4%대 후반이라면, 5억원 대출 기준 월 상환액이 60만원 이상 늘어날 수 있다.
같은 주, 반도체까지 흔들렸다
유가만이 아니다. 같은 주에 반도체 시장도 충격을 받았다. 구글 리서치가 3월 24일 공개한 터보퀀트(TurboQuant)는 AI가 대화 내용을 기억하기 위해 쓰는 메모리 사용량을 6분의 1로 줄이는 기술이다. AI에 들어가는 메모리 수요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번지면서, 이틀 뒤인 26일 삼성전자가 4.71%, SK하이닉스가 6.23% 급락했다. 외국인과 기관은 이날 삼성전자를 2조3,000억원 넘게 팔아치웠다.
이 기술이 실제로 메모리 수요를 줄이는지는 논쟁적이다. AI가 답변을 만들어내는 과정(추론)에서 쓰는 메모리에만 적용되고, AI를 처음 훈련시키는 데 필요한 메모리 수요에는 영향이 없다. 증권가에서는 단기 과매도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반도체 대장주 두 곳이 한꺼번에 급락하면 코스피가 빠지고 외국인 매도가 이어진다. 유가 급등에 반도체 쇼크까지 겹치면서 원화 약세 압력이 두 갈래로 열린 셈이다.
4월이 갈림길이다
파키스탄 정부가 이슬라마바드에서 미-이란 휴전 회담을 중재하겠다고 나섰다. 연합뉴스 보도(3월 26일)에 따르면 이르면 이번 주말 회담이 열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그러나 이란 외무장관은 "어떠한 협상도 진행 중이 아니다"라고 공식 부인했고, 이스라엘이 호르무즈 봉쇄를 지휘한 이란혁명수비대 해군 사령관을 공습으로 제거하면서 회담 성사 여부는 더 불투명해졌다. 맥쿼리는 전쟁이 6월까지 장기화될 경우 브렌트유가 20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MBC 보도, 3월 27일). 전쟁이 끝나더라도 원유 공급이 바로 정상화되지는 않는다. 호르무즈 해협이 다시 열리고, 이란 수출이 재개되고, 유조선 보험료가 정상으로 돌아오기까지 수개월이 걸린다.
변동금리 주택담보대출을 갖고 있다면 은행 앱에서 금리 유형 변경 메뉴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고정금리로 바꾸는 데 드는 수수료와 앞으로의 이자 부담을 비교해야 한다. 금융감독원 '금융상품 한눈에'(finlife.fss.or.kr)에서 은행별 금리를 비교할 수 있다. 다음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회의는 4월 10일이다. 유가 100달러, 환율 1,508원인 상황에서 금리인하 가능성은 사실상 닫혔다.
재고는 쌓이고, 유가는 오르고, 기준금리는 묶여 있고, 대출이자는 오른다. 정부는 빠르게 움직였지만, 최고가격제는 주유소 판매가에 닿지 않고, 비축유 8일치로는 장기전을 버티기 어렵다. '수급 안정'과 '금리 동결'이라는 두 단어가 가려온 것은 시민의 지갑으로 흘러드는 전쟁값이다. 이슬라마바드 회담의 성사 여부와 4월 10일 금통위. 이 구조를 바꿀지, 굳힐지는 4월에 판가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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