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사
대륜고 이름 붙인 친일파, 외손자는 삼성 X파일 떡값 검사
국채보상운동 서상돈의 둘째 아들이 걸어간 정반대의 길
국채보상운동 주도한 서상돈의 차남,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지내
3·1운동 무마 조직 자제단 발기·자금줄…1942년 교남학교 인수해 대륜으로 개칭
외손자 김두희·김상희, 2005년 삼성 X파일 떡값 검사 명단에 이름 올려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담배를 끊어 나라 빚을 갚자는 운동이었다. 그 운동을 이끈 인물이 서상돈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고 학예회 뮤지컬로도 만들어지는 이름이다. 그런데 서상돈의 둘째 아들 서병조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반민족행위자다. 대구 대륜고등학교 재단을 인수해 지금의 교명을 붙인 사람도 그다.
서상돈은 배우지만 서병조는 배우지 않는다.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사람의 아들이 무엇을 했는지는 교과 과정 어디에도 없다. 뉴탐사 역사탐사가 15번째 친일파로 서병조를 꺼내 든 이유다.
3·1운동이 터지자 만든 조직, 자제단
서병조의 이름이 처음 크게 등장하는 자리는 1919년이다. 3·1운동의 만세 열기가 전국으로 번지자 친일 인사들은 자제단을 만들었다. 만세를 자제하라는 뜻이다. 대구 자제단은 그해 4월 6일 박중양 등이 중심이 돼 전국에서 가장 먼저 결성됐다. 서병조는 발기인이자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자제단이 한 일은 만세 시위 참가자를 설득해 돌려보내고, 정보를 모아 밀고하고, 검거에 협조하는 것이었다. 서병조는 운영과 활동에 드는 비용을 대는 자금줄 노릇을 했다. 성주까지 직접 출장을 가며 조직 확대에 나섰다. 그 자금의 뿌리는 아버지 서상돈이 모은 재산이었다.
이후 그의 이력은 총독부 체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1916년 메이지신궁봉찬회 경북위원, 1918년 조선식산은행 상담역, 1922년 조선화재해상보험 취체역, 1924년 조양무진 사장과 중추원 주임참의를 맡았다. 취체역은 지금의 이사다. 1938년에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대구지부장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 자리에 올랐다.
벚꽃 아래서 천황을 본 조선인 두 명
일본 황실은 가을에 국화를 보는 관국회, 봄에 벚꽃을 보는 관앵회를 열었다. 도쿄 신주쿠 어원 등에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황실이 따로 초대장을 보낸 사람만 참석할 수 있었다. 조선인 민간인이 초대받기 시작한 것은 1929년부터다. 한 번에 한두 명이 전부였다.
1934년 관앵회에 초대된 조선인은 서병조와 박영철 두 사람이었다. 서병조는 아내와 함께 도쿄로 건너가 히로히토 천황을 봤다. 그가 남긴 소감에는 "지존의 용안을 뵈었으니 진실로 감격하였으며 일대의 광영"이라고 적혀 있다.
이듬해 조선총독부는 시정 25주년을 맞아 조선공로자명감을 펴냈다. 조선을 키운 사람이라는 뜻의 제목이었다. 서병조는 총독부 시정 방침을 철저히 선전해 내선융화를 조장한 인물로 소개됐다. 대구 녹화운동의 주인공이라는 설명도 붙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운동권 학생을 강제 징집해 사상을 바꾸겠다며 쓴 녹화사업이라는 말은, 이미 총독부 시정 방침의 어휘였다.
교남학교가 대륜이 된 사연
대륜고등학교의 뿌리는 1921년 대구 수창동 우현서루에 문을 연 교남학원이다. 홍주일, 김영서, 정운기 등 애국지사들이 세웠다. 1924년 교명을 대구 교남학교로 바꾸고 남산동으로 옮겼다.
이 학교의 국어 교사가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이상화다. 학생 명부에는 이육사의 본명 이원록과 그 동생 이원조가 올라 있다. 서상돈 고택과 이상화 고택은 지금도 대구 계산동에 나란히 남아 있다.
민족 재단으로 출발한 학교는 1930년대 들어 탄압과 재정난에 시달렸다. 그리고 1942년 서병조가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학교 이름이 대륜으로 바뀌었다. 대륜의 윤(倫)은 천황에 대한 충성과 효도를 뜻한다. 해방 뒤 교명을 되돌릴 기회는 있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대륜고는 언론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애국지사가 설립한 명문 민족사학이라고 소개해 왔다. 재단을 인수해 지금의 교명을 붙인 사람이 중추원 참의였다는 사실은 그 소개문 어디에도 없다.
외손자들, 삼성 X파일에 이름을 올리다
서병조의 그림자는 해방 뒤에도 길게 이어진다. 김두희 전 법무부 장관과 김상희 전 법무부 차관은 사촌 형제이자 서병조의 외손자다.
김상희 전 차관은 김영삼 정부 시절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로 5·18 사건 주임검사를 맡았다. 광주에 내려가 현장 조사를 벌였고, 그때만 해도 평이 나쁘지 않은 검사였다.
2005년 8월 18일 노회찬 의원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안기부 도청 녹취록을 읽어 내려갔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학수 삼성 회장 비서실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이 나눈 대화, 이른바 삼성 X파일이다. 대화록에는 김두희에게 2000만원, 김상희에게 500만원, 홍석조에게 2000만원을 건네자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홍석조는 홍석현의 동생이다. 광주고검장과 서울고검 차장검사를 지낸 뒤 BGF리테일 회장이 됐다. 그의 아버지 홍진기의 부인 김윤남은 중추원 참의 김신석의 딸이자 김두희의 고모다. 서병조의 외손자 형제와 홍진기 집안은 한 줄로 이어진다. 떡값 명단에 나란히 오른 세 사람이 한 집안이었다는 뜻이다.
결말은 알려진 대로다. 도청 내용을 보도한 이상호 기자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의원은 2013년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라는 논리 앞에서 돈을 주고받은 쪽은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가 비자금 위치까지 짚었지만 그 역시 흐지부지됐다.
한 달 만에 풀려난 반민특위 체포 14호
서병조는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됐다. 체포 순번 14호였다. 경북 고령 출신인 김상덕 위원장이 그를 지목했다. 체포 1호는 박흥식이었다.
감옥에 있던 기간은 한 달 남짓이다. 그해 6월 6일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면서 조사는 무너졌고 서병조는 풀려났다. 수감 중 그는 간수를 붙들고 풀어주면 재산 절반을 주겠다고 매달렸다고 한다. 풀려난 뒤로는 입을 다물고 살았다.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가서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고, 1952년 2월 29일 숨졌다.
대륜고등학교는 1988년 대구 수성구 만촌동으로 옮겨 지금에 이른다. 교정에는 기념탑이 서 있고, 학교 소개에는 애국지사가 세운 민족사학이라는 설명이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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