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기름값이 일정 가격 이상 못 오르게 막았다. 29년 만에 처음이다. 그런데 이 제도의 비용을 누가 내는지 따져보면, 결국 우리 세금이다. 정유사가 싸게 팔아서 손해 본 만큼, 정부가 세금으로 메워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주유소에서 아낀 돈이 나중에 세금 고지서로 돌아오는 구조다.
기름값이 왜 이렇게 올랐나
이란과 미국이 전쟁 중이다. 이란은 보복 수단으로 호르무즈 해협을 막아버렸다. 이 해협은 전 세계 기름의 5분의 1이 지나가는 바닷길이다. 한국은 쓰는 기름의 70%를 중동에서 가져온다. 이 길이 막히면 세계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이다. 14일 기준 국제유가(WTI)는 배럴당 99달러다. 한 달 전에는 65달러였다.
여기에 더 나쁜 소식이 있다. 기름은 달러로 산다. 그런데 원화 가치도 동시에 떨어지고 있다. 14일 환율은 달러당 1,497원이다. 기름값이 오르는데 원화까지 약해지면, 같은 양의 기름을 사는 데 드는 원화는 두 배로 뛴다. 실제로 원화로 환산한 기름값은 한 달 새 57% 올랐다.
석유 최고가격제, 뭘 어떻게 막나
13일부터 시행된 석유 최고가격제는 이런 제도다. 정유사가 주유소에 기름을 넘길 때, 일정 가격 이상을 받지 못하게 막는다. 지금 정해진 상한선은 휘발유 리터당 1,724원, 경유 1,713원이다. 정유사가 원래 받으려던 가격보다 휘발유는 109원, 경유는 218원 싸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이 상한선은 정유사가 주유소에 파는 가격에만 적용된다. 주유소가 소비자에게 파는 가격은 자유다. 실제로 시행 첫날 전국 평균 휘발유 판매가는 리터당 1,893원이었다. 상한선보다 169원 비싸다. 주유소가 이미 비싸게 사들인 기름을 다 팔아야 가격이 내려간다. 최소 수일에서 2주는 걸린다.
정유사 손해는 누가 메우나
핵심은 이것이다. 정유사가 상한선 아래로 기름을 팔면 손해를 본다. 그 손해를 정부가 나중에 세금으로 갚아주기로 했다. 얼마를 갚아줄지, 어디서 돈을 마련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기름값이 더 오르면 어떻게 될까. 상한선과 실제 원가의 차이가 벌어진다. 그 차이는 고스란히 세금으로 채워야 한다. 골드만삭스는 전쟁이 길어지면 기름값이 배럴당 150달러까지 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렇게 되면 세금으로 메워야 할 돈이 수조 원 단위로 불어난다.
정유사 입장을 좀 더 따져보자. 기름값이 오르기 전에 싸게 사놓은 기름이 있다. 이 재고를 비싸게 팔면 큰 이익이 난다. 4대 정유사(SK에너지·GS칼텍스·에쓰오일·현대오일뱅크)는 이 재고 이익만으로 수천억 원을 벌 수 있다. 반면 앞으로 새로 사오는 기름은 비싸다. 정부가 갚아주는 돈이 실제 비용보다 적으면, 정유사는 기름을 덜 사오는 쪽을 택할 수 있다. 1997년 이전에도 정부가 기름값을 억누르자 정유사가 공급을 줄여 주유소에 기름이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
유류세를 더 깎으면 안 되나
기름에는 세금이 많이 붙는다. 휘발유 리터당 약 820원이 세금이다. 절반 가까이가 세금인 셈이다. 정부는 지금 이 세금을 7% 깎아주고 있다. 리터당 57원 싸지는 효과다.
더 깎을 수는 없을까. 현행법에서 최대로 깎을 수 있는 한도는 37%다. 37%를 다 적용해도 리터당 304원 인하에 그친다. 기름값이 한 달 새 57% 뛴 상황에서, 300원 깎아봤자 체감 효과는 크지 않다.
37%를 넘어서려면 국회에서 법을 바꿔야 한다. 국민의힘은 50%까지 확대하는 법안을 준비 중이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도 법을 고쳐 50%까지 열었지만, 실제로 50%까지 깎은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법도 2024년에 만료됐다.
세금을 깎으면 정부에 들어오는 돈도 줄어든다. 2022년에 유류세를 37%까지 깎았을 때, 세금 수입이 1년 만에 5조 5,000억 원 줄었다. 여기에 정유사 손해 보전 비용까지 더하면, 정부 재정에 이중 부담이 된다.
대기업은 보험이 있고, 중소기업은 없다
기름값이 올라도 대기업은 버틴다. 미리 '보험'을 들어놨기 때문이다. 원유 가격이 오르면 돈을 받을 수 있는 금융 계약(파생상품 헤지)을 맺어둔 것이다. 수출 가격에 원자재 비용을 반영하는 구조도 갖추고 있다.
중소기업은 다르다. 이런 보험을 들 여력이 없다. 한국무역협회와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중소 제조업체 대다수는 기름값이 올라도 제품 가격에 반영하지 못한다. 대기업에 납품하는 가격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법으로 '원자재가 오르면 납품가도 올려줘야 한다'는 제도를 만들었지만, 현장에서는 대기업이 조정을 미루거나 거부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2022년 기름값이 130달러까지 치솟았을 때, 중소 제조업체 폐업이 급증했다. 원가는 올랐는데 파는 가격은 못 올린 결과다. 4년이 지났지만 이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같은 충격이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가난할수록 기름값 충격이 크다
기름값이 오르면 주유소 가격만 오르는 게 아니다. 택배비가 오르고, 농산물 운송비가 오르고, 플라스틱 포장재 가격이 오른다. 결국 마트에서 사는 모든 물건이 오른다.
이 충격은 소득에 따라 크게 다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소득 하위 20% 가구는 버는 돈의 약 18%를 전기·가스·기름에 쓴다. 소득 상위 20%는 약 6%다. 3배 차이다. 같은 기름값 충격인데, 가난한 가구가 3배 더 아프다. 뉴스에서 "물가가 3% 올랐다"고 하면 평균 이야기다. 저소득 가구의 체감 물가는 그보다 훨씬 높다.
정부가 저소득층에 에너지바우처(에너지 이용권)를 주고 있다. 전기·가스·등유 등을 살 수 있는 지원금이다. 문제는 이 바우처 금액이 기름값에 연동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름값이 50% 올라도 바우처 금액은 그대로다. 기름값이 오를수록 바우처로 살 수 있는 기름은 줄어든다.
에너지바우처 대상은 기초생활수급자 중 노인·영유아·장애인·임산부·중증질환자가 있는 가구다. 주민센터에서 신청하거나 복지로(www.bokjiro.go.kr)에서 온라인 신청이 가능하다. 문의는 한국에너지공단 1600-3190이다.
자영업자는 기름값과 이자를 동시에 맞고 있다. 미국 금리가 내려갈 기미가 없어서, 한국 은행 대출 이자도 당분간 안 내려간다. 변동금리 대출이 있는 자영업자는 은행에 가서 고정금리로 바꿀 수 있는지 상담해볼 시점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전쟁이 빨리 끝나면 기름값도 내려간다. 2~3주 안에 휴전 협상이 되면 80달러대로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란의 새 지도자 모즈타바 하메네이는 13일 "해협을 계속 막겠다"고 선언했고, 미국의 휴전 제안을 두 차례 거부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전쟁이 1~2개월 이어지면 기름값이 150달러까지 갈 수 있다. 그러면 정유사에 갚아줄 세금, 유류세 깎아서 줄어든 세금이 합쳐져 재정에 수조 원 구멍이 난다. 더 길어지면 한국이 비축해둔 기름(약 90일분)이 바닥나기 시작한다.
석유 최고가격제와 유류세 인하는 진통제다. 통증은 줄여주지만 병을 낫게 하지는 못한다. 호르무즈 해협이 열리지 않는 한, 진통제 비용은 세금으로 쌓이고, 그 청구서는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먼저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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