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사
이토 히로부미가 이름 지어준 배정자, 김계조 사건까지 이어졌다
미쓰코시백화점 3층 국제문화사에서 벌어진 총독부의 마지막 공작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딸 이름 '사다코' 물려준 배정자
고종의 러시아 망명 계획 밀고…헌병 160명 동원돼 무산
조카 배구자의 남편 김계조, 총독부 자금 730만원으로 공작
친일파 배정자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넘어가는 길목에도, 해방 직후 반민특위가 좌초하는 길목에도 이 이름이 걸려 있다. 배정자와 그의 조카 배구자, 배구자의 남편 김계조로 이어지는 계보를 따라가면 우리 현대사의 첫 단추가 어디서 잘못 끼워졌는지가 드러난다.
곤장에 죽은 아버지, 이토가 내려준 이름 사다코
배정자의 본명은 배분남이다. 1870년 김해에서 아전 배지홍의 딸로 태어났다. 배지홍은 분성 배씨를 대표해 여흥 민씨를 물리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고종의 진노를 샀고, 곤장을 맞다 숨졌다. 배정자가 고종에게 원한을 품게 된 출발점이 여기다.
먹고살 길이 막힌 배정자는 열살에 관기가 됐다. 관기 생활을 견디지 못해 열두살에 여승이 됐고, 아버지의 지인 정병하에게 의탁했다. 정병하는 배정자를 일본으로 유학 보냈다. 일본에서 안경수를 만났고, 안경수는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던 김옥균을 소개했다. 김옥균은 다시 이토 히로부미에게 배정자를 소개했다.
이토는 배정자를 보고 죽은 딸을 닮았다고 했다. 딸의 이름은 사다코였다. 이토는 배정자에게 그 이름을 물려줬다. 사다코를 한자로 쓰면 정자(貞子)다. 배정자라는 이름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토와 배정자의 관계를 두고 국내 역사 유튜브에서는 양녀설이 소문일 뿐이라는 설명이 많다. 죽은 딸의 이름까지 내려줄 정도였다면 총애의 성격은 양녀보다 애첩에 가깝다.
고종의 망명 계획을 팔아넘기다
배정자는 고종에게 접근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우범선을 처단하러 일본에 건너간 자객과 가까워진 뒤, 그 신임장을 들고 궁으로 들어갔다. 아내를 지키려 보낸 자객의 신임장을 들고 온 여인을 고종은 의심하지 않았다. 배정자는 매일 문안을 드리며 신임을 쌓았다.
1909년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되자 배정자는 자리에 드러누웠다. 조선헌병대장으로 부임한 아카시 모토지로가 그를 다시 끌어냈다. 아카시는 러일전쟁 이전 러시아 혁명 세력에 일본 정부 자금을 대던 인물이다. 배정자에게 상금 1600원을 안기고 고종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지금 가치로 16억원에 가까운 돈이다.
당시 고종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안전지대에서 싸운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고종은 배정자에게 블라디보스토크가 춥다며 따라가 달라는 뜻을 내비쳤고, 사흘 뒤 계획이 있다고 말했다. 배정자는 이를 그대로 아카시에게 넘겼다. 아카시는 헌병 160명을 풀어 고종을 에워쌌고 망명 계획은 무산됐다. 그때까지 고종 편에 서 있던 이완용이 조선은 끝났다고 판단하고 을사오적의 길로 접어든 것도 이 무렵이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배정자는 만세를 불렀다. 이토가 죽었을 때 드러누웠던 사람이다.
미쓰코시백화점 3층, 국제문화사
배정자의 조카로 알려진 배구자는 무용가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무용가로는 최승희, 배구자, 김백봉이 꼽힌다. 김백봉은 대한민국에 남았고 최승희는 남편을 따라 북으로 갔다. 배구자는 남았다. 배구자가 배정자의 조카가 아니라 딸이라는 소문은 당시에도 파다했다.
배구자의 두 번째 남편이 김계조다. 김계조는 1945년 경성 미쓰코시백화점 3층에 국제문화사를 차렸다. 겉으로는 배구자의 댄스홀이자 사교클럽이었다. 실제로는 조선총독부 자금이 흘러드는 공작 거점이었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김계조는 조선은행에서 310만원, 조선산업은행에서 212만원, 야스다은행 경성지점에서 204만원을 받았다. 김계조가 손에 쥔 비밀자금은 730만원에 이른다. 지금 가치로 750억원 규모다. 김계조가 내건 목표는 조선의 평화를 교란하고 주요 인사를 암살하며 미국과 소련 사이를 이간질하고 조선인들에게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이었다. 만주에 남은 일본군이 미국에 저항하도록 부추긴다는 항목까지 들어 있었다.
그 자리는 지금 신세계백화점 본점이다. 3층 어디에도 국제문화사가 있었다는 표석은 없다.
김용무 대법원장이 무너진 자리
1945년 9월 22일 독립운동가 김정목이 윤명 변호사를 통해 이 공작을 미군정에 제보했다. 김정목의 이후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문제는 제보 이후에 벌어졌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여운형을 불러 일본으로부터 얼마를 받아먹었느냐고 물었다. 여운형은 크나큰 모욕을 느꼈다. 하지는 그때부터 독립운동가 전반을 일본에 매수된 집단으로 보기 시작했다. 하지가 돌아선 이유를 신탁통치 찬반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찾는 설명이 많지만, 실제 분기점은 김계조 사건이었다.
미군정이 1945년 10월 15일 임명한 초대 대법원장이 김용무다. 김용무는 1930년대부터 해방 때까지 무료 변론을 이어온 변호사다. 김상옥 의사 사건과 조선어학회 사건을 변호했다. 박영철이 만주 펑톈 동광중학교에 낼 기부금 3만원을 조선 사업가들에게서 뜯어내자 소송을 걸어 그 돈을 되찾아 주기도 했다. 미군정이 반민특위 성격의 기구를 세우려 했을 때 법안 통과를 밀어붙인 쪽도 이 사람이었다.
그런 김용무가 김계조의 돈에 넘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1946년 1월 김계조 사건이 재판에 넘어가면서 젊은 법조인들이 대법원장 불신임에 나섰고, 김용무는 그해 대법원장직에서 물러났다. 반민특위를 향하던 흐름도 함께 꺾였다. 김용무는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나무위키에는 1951년 사망으로 적혀 있으나 실제로는 1957년 평양에서 숨졌고, 그전까지 대남방송에 악용됐다.
배정자의 세 번째 남편 박영철
박영철은 1905년부터 1911년까지 배정자의 남편이었다. 익산군수, 함경북도와 전라북도 참여관, 강원도지사, 함경북도지사,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조선상업은행 7대 은행장,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15기다.
1919년 4월 30일 매일신보 논설에서는 성과 없는 3·1운동을 그만두라고 썼다. 자제단이 하던 일의 서울 버전이다. 1937년 국방헌금 1만원을 총독에게 냈고, 황군 위문 카드 5만매를 제작해 일본군에 배포했다. 1938년에는 조선 최초로 금비녀 다섯점을 경성부 시국총동원과에 헌납했다. 금 모으기 운동의 원형이 여기 있다. 1939년 3월 10일 예순의 나이에 뇌경색으로 숨졌다.
조선총독부가 1935년 펴낸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이 실렸다. 박영철도 그 안에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은 이 명단에서 가지를 뻗어 나갔다.
창신동 안양암에 누워 있는 비석
배정자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은 서울 사대문 안에 있다. 종로구 창신동 안양암이다. 1939년 세워진 삼화부인회 10주년 기념비다. 명단 맨 아래에 고문 배정자, 그 위에 일본 이름 사다코가 적혀 있다. 삼화부인회는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수탈 정책에 앞장선 친일 부인 단체다.
안양암은 배정자가 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 모집을 접수하고 창씨개명 신청을 받던 곳이다. 헤어진 남편 박영철의 금비녀 접수 창구로도 쓰였다. 1949년 2월 반민특위 검거를 앞두고 배정자가 마지막으로 몸을 숨긴 곳도 이 일대다.
비석은 지금 옆으로 넘어진 채 방치돼 있다. 옆에서 진행 중인 공사 탓에 쓰러진 것인지, 누군가 알고 넘어뜨린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안내판도 설명도 없다. 세울 때는 천년 만년 갈 줄 알았을 비석이 80년을 못 채우고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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