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사
반민특위 체포 1호 박흥식, 친일잔재는 광신학원에 그대로
안창호의 학교를 비행기 공장으로 바꾼 친일 갑부
반민특위 1949년 1월 8일 박흥식 체포, 김상덕 위원장이 1호로 지목
1944년 광신상고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바꿔 학생 강제 동원
1956년 사면된 기시 노부스케를 화신 도쿄사무소 고문으로 위촉
1949년 1월 8일 새벽 5시.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 뒷문을 빠져나가던 한 남자가 잡혔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첫 체포자, 박흥식이다. 조선 최고의 갑부였고, 일제 강점기 내내 조선총독부와 호형호제하던 사내였다. 그가 남긴 친일 잔재는 지금도 서울 양천구의 한 학원으로 살아 있다.
지난달 29일 친일재산 환수법 개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제2소위를 통과했다. 16년 만에 친일재산조사위가 다시 출범할 길이 열린 시점이다. 뉴탐사 역사탐사는 친일파 박흥식의 행적과 그 잔재를 추적했다.
종로 한복판의 조선 최대 백화점
박흥식은 평안남도 진남포 출신이다. 1926년 경성으로 올라와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차렸다. 종이 도매업이었다. 신문용지 거래처는 조선총독부 관료의 개입으로 손쉽게 확보됐다. 출발부터 권력과의 결탁이 사업 모델이었다.
1929년 대공황이 닥쳤다. 종로 이정목에서 화신상회를 운영하던 신태화는 박흥식에게 자금을 빌렸다. 신태화가 빚을 갚지 못하자 1931년 화신상회 경영권은 주식 형태로 박흥식에게 넘어갔다. 화신백화점의 출발이다.
박흥식은 1932년 길 건너 동아백화점을 합병했다. 인수 과정에서 종로 한복판 기와집 한 채를 경품으로 걸었다. 매장으로 사람이 몰렸고, 동아백화점은 버티지 못했다. 두 백화점은 구름다리로 이어졌다.
1935년 연초 대목, 화신백화점에 큰불이 났다. 동아백화점 자리까지 모두 탔다. 박흥식은 화재보험금 44만원을 즉시 받았다. 평소 호형호제하던 우가키 가즈시게 조선총독에게 달려갔다. 우가키는 옛 종로경찰서 자리를 임시 회장으로 내줬다. 영업 손실은 최소화됐다. 같은 자리에 새 건물이 올라갔다. 지하 1층 식료품부, 1~4층 매장, 5층 대식당, 6층 영화관. 지금 백화점과 같은 구조였다. 엘리베이터 세 대, 조선 최초의 에스컬레이터 두 대가 들어섰다. 신문은 "움직이는 층계"라 보도했다. 공사비 47만원이 화제였다. 지방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 한번 타보겠다고 종로로 몰렸다.
화신백화점 5층 대식당의 인기 메뉴는 비빔밥과 떡국이었다. 박흥식이 중식을 좋아하지 않은 탓이라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종로타워 자리, 보신각 맞은편이다.
1948년 7월 18일, 미국 비자
박흥식은 자신을 "조선의 백화점을 운영한 사람"이라며 민족 자본가로 포장했다. 일제 강점기 종로통 5대 백화점 중 미스코시·히라타·조지아·미나카이는 모두 일본인 소유였다. 화신만이 조선인 소유였다. 박흥식은 이 점을 평생 면죄부로 들이댔다.
그러나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 부칙 제101조에 따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됐다. 그 다음 날인 7월 18일, 박흥식은 부인과 함께 미국 비자를 발급받았다. 정부 최고위 관계자가 아닌 민간인이 미국 비자를 받는 것은 당시 사실상 불가능했다. 신문은 이를 "신문에 날 일"이라 보도했다. "신문에 날 일이구먼"이라는 우리말 표현이 여기서 비롯됐다는 게 백이성 역사독립군의 설명이다.
반민특위 제3조사부에 박흥식이 미국으로 망명할지 모른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은 이덕근 조사관과 서울시경 형사들을 종로 화신백화점 사무실로 들여보냈다. 1949년 1월 8일 새벽 5시였다. 박흥식은 정문이 아닌 뒷문 어두운 계단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뒷문에는 이미 경찰이 대기하고 있었다. 반민특위 체포 제1호. 김상덕이 직접 명령한 결과였다.
당시 반민특위 안에서는 이광수나 친일 경찰 이종형 같은 인물부터 잡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김상덕은 박흥식을 1호로 지목했다. 박흥식이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형제와 친일 경찰 최난수에게 막대한 자금을 뿌리며 명단에서 자신을 빼달라고 청탁한 정황이 포착된 뒤였다. 최난수는 훗날 반민특위 체포 15호가 된다.
광신학원, 안창호의 학교가 비행기 공장으로
광신학원의 전신은 1905년 세워진 서우학교다. 박은식, 이승훈 등이 세운 민족학교였다. 안창호도 학교 운영에 관여했다. 박흥식은 1932~34년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한 안창호 선생을 2년간 전속 간호사 세 명을 붙여 돌봤다. 같은 평안도 출신이라는 인연이었다. 박흥식은 훗날 반민특위 조사 과정에서 이 일을 자신의 면죄부로 들이밀었다.
이 인연으로 박흥식은 1939년 학교 재단을 인수했다. 이름은 광신으로 바뀌었다. 빛날 광(光), 새로울 신(新)이다.
결정적 행위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1937년 일본은 중국 충칭을 대규모 폭격했다. 미국은 일본에 항공류와 비행기 부품 수출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조선의 친일 자본가들을 압박해 군수 생산을 떠넘겼다. 1944년 10월 1일 박흥식은 안양에 조선비행기공업회사를 세웠다. 총독부 지정 군수기업체였다. 막대한 자금 지원과 무한정의 인력 징발권이 따라왔다.
1945년 4월, 박흥식은 광신상업고등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전문학교로 바꿨다. 학생들을 비행기 부품 생산에 강제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 해 8월 해방까지 비행기는 단 한 대 만들어졌다. 광신학원이 잠시 학교가 아닌 군수공장이었다는 사실은 지금도 학교 안내문 어디에도 없다.
광신학원 동상, 2001년 12월 23일 철거
광신학원은 지금 서울 양천구에 있다. 광신중학교, 광신고등학교,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가 같은 재단 아래에 있다. 1967년 동대문구 회기동에서 현 위치로 이전했다.
교내에 있던 박흥식 동상은 2001년 12월 23일 철거됐다. 민족문제연구소 박영환 씨가 그해 11월 9일부터 학교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인 끝에 이뤄진 결과다. 그러나 재단 이름은 그대로 광신이다. 박흥식의 호 '유재'를 딴 유재기념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광신학원은 지난해 개교 12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무대 뒤에 태극기가 걸렸다. 1905년 서우학교를 자신들의 출발점으로 셈한 행사였다. 박흥식이 1939년 인수해 1945년 비행기 공장으로 바꾼 역사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뉴탐사 취재진이 학원 인근 주민들에게 친일 학교임을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답하는 이가 많았다. 한 주민은 "동상이 있던 건 봤다"면서도 "민감한 문제니까"라며 말을 아꼈다. 학교가 회기동에서 1967년 옮겨왔다는 사실까지 정확히 기억하면서도, 친일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입이 닫혔다.
기시 노부스케에서 박정희까지
박흥식은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매번 감옥에 들어갔다 풀려났다. 우가키 가즈시게, 미나미 지로, 고이소 구니아키, 아베 노부유키 같은 조선 총독부터 미군정 하지 중장,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까지. 정권마다 부정축재 또는 매판 혐의로 수감됐고, 매번 보석으로 풀려났다. 박흥식이 정치 자금을 대 가며 권력의 빈틈을 메운 결과였다.
박정희 정부에서 외무부 장관을 지낸 김동조의 회고록 '비화: 내가 겪은 한국 외교'에 박흥식의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도쿄전범재판에서 종신형을 받고 1956년 사면된 기시 노부스케를 박흥식이 화신 도쿄사무소 고문으로 위촉해 자신과 같은 수준의 생활비를 지급했다는 기록이다. 기시는 훗날 일본 총리가 됐다. 그의 외손자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다.
박흥식이 미국 여권 재발급을 위해 1959년 신청서에 보증인으로 적은 이름은 한희석 국회 부의장, 최인규 내무부 장관, 홍진기 법무부 장관이었다. 홍진기는 조봉암 사법살인의 핵심 인물이다.
해방 직후 김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이 귀국했을 때 박흥식은 종로 일대 대저택을 그들의 거처로 제공했다. 김구의 경교장, 이승만의 이화장이 그렇게 박흥식이 내준 집이었다. 일종의 '보험'이었다.
박흥식은 노태우 정권 때 사망했다. 화신백화점 자리에는 종로타워가 들어섰다. 광신학원은 같은 이름으로 운영 중이다. 안양 옛 비행기 공장 부지에는 어떤 표지석도 없다. 그의 후손들은 광신학원과 흥한재단 등 사학과 기업을 통해 자산을 유지하고 있다.
박흥식이 김상덕 위원장 앞에서 항변했다는 일화 한 토막이 남아 있다. 박흥식은 자신이 조선의 백화점을 운영하느라 총독부와 가까웠을 뿐이라고 했다. 김상덕은 한 마디로 잘랐다. "그렇게 떳떳한데 왜 미국으로 도망가려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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