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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에도 노상원 같은 수거 작전 있었다"...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 아들 증언

노덕술이 국회의장·대법원장 등 15명 납치해 38선서 사살하려던 계획 폭로

2025-08-16 11:07:49

광복 80주년인 8월 15일, 놀라운 역사적 증언이 공개됐다. 2024년 12·3 내란 당시 노상원이 작성한 '수거 명단'과 똑같은 일이 76년 전인 1948년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아들 김정륙(90) 씨는 뉴탐사와의 특별대담에서 "1948년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이 반민특위 위원장인 아버지를 비롯해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 15명을 납치·살해하려는 수거 작전을 계획했다"고 폭로했다. 이날 대담에는 이영국 반민특위기념사업회 사무총장도 함께했다.


76년 전과 똑같은 '수거 작전'의 충격


노덕술의 15인 명단 vs 노상원의 수거 리스트


이영국 사무총장은 "1948년 노덕술과 최난수가 수도청 수사과장실에서 백민태라는 테러리스트를 고용해 15명 수거 계획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노덕술은 당시 수도청 전임 수사과장, 최난수는 후임 수사과장이었다.


수거 대상 15명은 충격적이었다.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과 부위원장, 신익희 국회의장, 김약수 부의장, 김병로 대법원장 겸 반민특위 특별재판소장, 권승열 검찰총장 겸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장 등 입법부와 사법부 수장들이 모두 포함됐다.


계획은 치밀했다. 이들을 납치해 38선 부근까지 끌고 간 뒤 사살하고, "조국을 배신하고 북한으로 넘어가려다 적발돼 사살했다"고 발표할 예정이었다. 이는 2024년 노상원이 국회의장 등을 백령도로 끌고 가 수장시키려 했던 계획과 판박이다.


백민태의 양심선언으로 무산된 테러


김정륙 씨는 "백민태가 거사 자금으로 받은 권총, 수류탄, 현금 수표를 들고 김웅진 의원과 조봉암 의원에게 자수했다"고 증언했다.


백민태가 자수한 이유는 극적이었다. "15명 명단에 자신이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2명이 포함돼 있어 차마 실행하지 못했다. 백민태는 일제 말기 중국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목격했던 아나키스트였다. 끝까지 그 2명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대신 테러할까 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거사 자금은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이 댔다. 박흥식은 일제에 군용기를 헌납했던 대표적 친일 기업인이었다. 언론 담당은 관동군 밀정 출신 이종형이었다.


"대통령 승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


이영국 사무총장은 "노상원이 김용현과 윤석열의 지시나 승인 없이 국회의장을 수거 대상으로 삼을 수 없었듯이, 당시 수도청 수사과장이 대법원장과 검찰총장을 납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대통령 승인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처음부터 적대시했다. 1차 수거 작전이 실패하자 2차 작전이 시도됐고, 결국 1949년 6월 6일 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이승만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모든 지시는 내가 명령했다"고 시인했다.


이승만의 직접 회유 "장관 자리 줄게"


1949년 5월 어느 밤, 대통령이 직접 찾아와


김정륙 씨는 반민특위 습격 며칠 전인 1949년 5월 말 밤, 이승만이 김상덕 위원장 관사를 직접 찾아온 일을 생생히 증언했다.


"그날 밤 아버지가 급히 우리 가족들을 불러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다. 경호원들이 집 안팎을 포위했는데, 필요 이상으로 많은 병력이었다. 겁박하려는 의도였다."


당시 16세였던 김정륙 씨는 방 안에서 아버지와 이승만의 대화를 직접 들었다. "이승만이 주머니를 열었다. 반민특위 활동 기간이 끝날 때까지 하는 척만 하고, 노덕술이나 최난수 같은 친일 경찰들을 풀어주면 장관 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문교부 장관이 싫으면 다른 장관도 가능하다며 장관 보따리를 가지고 흥정하러 온 것이었다."


회유 실패 후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


김상덕 위원장이 단호히 거절하자, 이승만은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6월 6일, 서울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의 지휘 아래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친일 경찰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서류를 탈취하는 것이었다. 전국에서 들어온 친일파 고발 진정서와 투서를 모두 가져갔다. 그리고 직원 40여 명을 2층으로 몰아 집단 구타했다. 적십자병원에 실려갈 정도였다."


흥미로운 것은 현충일 날짜다. 이영국 사무총장은 "1951년 한국전쟁 중 국무회의에서 6월 6일을 현충일로 정했는데, 반민특위 습격일을 역사에서 지우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추론이 많다"고 설명했다.


반민특위가 막지 못한 비극들


친일 경찰 노덕술, 반민특위 조사관 살해


김정륙 씨는 아버지가 직접 임명한 김철호 조사관의 비극적 운명을 증언했다. "통영 출신 김철호 선생은 통영에서 악명 높았던 노덕술을 체포하는 데 앞장섰다. 그런데 반민특위가 해체된 후 노덕술이 김철호 선생을 통영으로 유인해 배에 태운 뒤 바다에서 수장시켜 살해했다."


노덕술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고문·살해한 악질 친일 경찰이었다. 반민특위 해체 후 수도경찰청 수사과장까지 올랐다. "지금으로 치면 무궁화 3~4개 급이다. 해방 하루 전날까지 황군 충성을 독려한 윤치영도 내무부 장관이 됐다."


일제 헌병 박종표, 김주열 열사 두 번 죽여


더 충격적인 것은 일본 헌병 오장 출신 박종표의 악행이다. 오장은 조선인이 올라갈 수 있는 헌병 최고 계급이었다. 박종표는 반민특위에 체포됐다가 재판도 마치지 못하고 풀려났다.


이영국 사무총장은 "1960년 3·15 부정선거 때 박종표가 마산경찰서에서 시위 진압 현장 책임자로 김주열 열사를 최루탄으로 살해했다"며 "시신이 떠오르자 돌덩이 6개를 철사로 묶어 다시 수장시켰다. 살인과 시체 유기를 저지른 것"이라고 분노했다.


반민특위 출범부터 견제받아


예산도 청사도 주지 않은 이승만 정권


반민특위는 1948년 제헌헌법 101조와 대한민국 법률 제3호로 출범한 헌법기관이었다. 정부조직법을 제외한 첫 번째 법률이 바로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이었다.


그러나 김정륙 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 정권은 처음부터 반민특위를 철저히 견제했다. "반민특위가 앉을 장소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예산은 내무부에서 집행하게 되어 있었는데, 내무부 장관 윤치영이 1945년 8월 14일까지 황군 충성을 독려했던 친일파였다."


결국 김상덕 위원장이 이원용 총무과장을 통해 개인적으로 을지로 입구 건물을 구해 청사로 사용했다. "아버지가 이원용 씨를 도남동 집으로 찾아가 '땅에 떨어진 민족 정기를 회복하는 성스러운 자리'라고 설득했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밀약


김정륙 씨는 이승만의 귀국 과정에 숨은 밀약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요인들보다 먼저 귀국하면서 도쿄에서 맥아더와 하지를 만났다. 미군정 포고령 1호대로 일제 관료들을 그대로 쓰기로 약속한 것이다."


실제로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미군정의 방해로 1945년 11월과 1946년 1월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반면 이승만은 미군 특별기를 타고 1945년 10월 서둘러 입국했다.


역사의 아이러니: 박정희를 살린 김상덕


김정륙 씨는 놀라운 사실을 공개했다. "박정희가 여순반란 사건에 연루돼 위기에 처했을 때, 아버지가 구명 운동에 나섰다. 박정희는 간도특설대 장교로 독립군 토벌대를 지휘했지만, 당시 주요 처벌 대상은 아니었다."


"누군가 아버지에게 간곡히 부탁했고, 아버지가 쉽게 물리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왜 구제해줬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김상덕 위원장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박정희는 후에 5·16 군사반란을 일으켜 친일 세력을 보호했다.


77년 만의 재심, 국회 프락치 사건


반민특위 와해의 결정적 계기가 된 국회 프락치 사건이 77년 만에 재심을 앞두고 있다.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를 지지한 소장파 의원 13명을 남조선노동당 프락치로 조작했다.


이영국 사무총장은 "제헌국회 의원 200명 중 13명을 간첩으로 조작한 대한민국 제1호 간첩 조작 사건"이라며 "반민특위를 와해시킬 유일한 명분이 반공 프레임이었다"고 설명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25년 4월 이 사건을 국가 조작으로 인정했다. 반민특위기념사업회는 7월 8일 재심 소송을 시작했다. 소송비 후원 계좌는 우리은행 1002-601-903037(예금주 김영자)다.


"내란의 뿌리는 친일 청산 실패"


김정륙 씨는 "반민특위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우리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며 "이제라도 못다 이룬 반민특위의 꿈을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영국 사무총장은 "1948년 수거 작전과 2024년 12·3 내란이 판박이인 것은 친일 청산 실패가 내란의 뿌리임을 보여준다"며 "독립기념관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등 뉴라이트가 장악한 주요 기관에 대한 감시와 척결이 시급하다"고 역설했다.


76년 전 노덕술의 수거 작전과 2024년 노상원의 수거 명단. 역사는 왜 이렇게 똑같이 반복되는가? 1949년 김상덕 위원장이 이승만의 더러운 거래를 거절했던 그 용기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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