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암행어사

전직 검찰총장 조카 국영기업 사칭 7억 사기에도 침묵하는 우즈벡

형제의 가면 뒤 피눈물 흘리는 한국인

2025-12-29 00:11:05

우즈베키스탄에서 합작 사업을 하던 한국인 김철수(가명)씨가 7억 원대 사기 피해를 당한 후 2년 넘게 현지 수사기관의 무성의한 태도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 대사관이 여러 차례 공한을 보내고 영사가 직접 면담했지만, 우즈베키스탄 당국은 수개월째 아무런 응답이 없는 상태다.


국영 통신사 자회사로 속여 합작 제안


김씨는 5년 전 한국 중소기업 파견으로 우즈베키스탄에 왔다. 당시 인터넷 케이블 제조 합작 회사 대표로 근무하던 그는 한국인 지인을 통해 현지인 바오디르를 소개받았다.

바오디르는 우즈베키스탄 최대 국영 통신사인 우즈텔레콤에서 17년간 근무한 경력을 내세우며 심카드 제조 사업을 제안했다. 김씨가 확인한 공식 문서에는 바오디르가 운영하는 브로드밴드솔루션(BBS)이 우즈텔레콤의 100% 자회사로 명시돼 있었다.

바오디르는 김씨를 우즈모바일 본사로 데려가 부사장과 미팅을 주선하고 직원들과 회식까지 했다. 국영 기업의 든든한 배경을 믿은 김씨는 회사를 퇴사하고 합작 사업에 뛰어들었다.


계약서에 숨긴 '텔레콤' 한 단어의 함정


2021년 A텔레콤(가명)이라는 합작 회사가 설립됐다. 한국 본사가 65%, 바오디르의 BBS가 35% 지분을 나눠 가졌다. 사업자등록증이 나온 날, 대화방에는 축하 메시지가 오갔다. "우리는 한 팀이다"라는 바오디르의 말이 있었다.

그러나 우즈베크어로 작성된 회사 정관에 함정이 숨어 있었다. 계약 상대는 BBS가 아니라 '텔레콤브로드밴드솔루션(TBBS)'이었다. 앞에 붙은 '텔레콤'이라는 단어 하나가 회사의 정체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사업자등록증을 확인한 결과 TBBS는 우즈텔레콤의 자회사가 아니라 바오디르가 100% 지분을 소유한 개인 회사였다. 브로드밴드솔루션 부분은 음영을 넣어 강조 처리해 시선을 끌었지만, 정작 중요한 '텔레콤'은 눈에 띄지 않게 배치됐다.


대표직 넘기지 않고 횡령 시작


바오디르는 "E-type 비자가 없으면 대표 등록이 안 된다"며 자신이 임시로 대표를 맡겠다고 했다. 김씨가 비자를 받은 후에도 대표직을 넘겨주지 않았다. "우즈텔레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계속 그러면 회사가 문을 닫는다"며 핑계만 늘어놓았다.

대표직을 장악한 바오디르는 본격적인 횡령에 나섰다. 2023년 5월, 김씨가 보낸 60만 달러(약 8억 원)로 중국에서 심카드 75만 개를 구매해 우즈텔레콤에 납품했다. 우즈텔레콤은 대금을 전액 지급했지만, 바오디르는 "일부만 들어왔다"며 위조된 은행 거래내역서를 제시했다.

위조 내역서에는 직인만 있고 은행 직원 서명이 없었다. 나중에 확인한 실제 내역서에는 여러 날에 걸쳐 전액이 입금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계약서로 5만 달러 추가 횡령


중국 회사와의 거래에서도 이중 계약서를 사용했다. 김씨에게 보여준 계약서는 심카드 한 장당 0.60달러였지만, 실제 계약은 0.53달러였다. 75만 장 기준으로 5만2500달러(약 7000만 원)의 차액이 발생했다.

바오디르는 위조된 송금증을 만들어 이 차액도 중국으로 보낸 것처럼 꾸몄다. 나중에 추궁당하자 "세금을 덜 내기 위해서"라고 둘러댔지만, 횡령한 돈을 중국 업체 담당자와 나눠 가진 정황이 드러났다.


주주회의록 위조해 4만 달러 대출


바오디르는 김씨 몰래 은행에서 4만 달러를 대출받았다. 대출에 필요한 주주회의록을 위조하면서 김씨의 서명과 직인을 포토샵으로 조작했다. 원본 서류는 은행에 제출하지 않고 사본만 제출했다.

6개월 거치 기간이 끝나고 은행에서 상환 요구가 오자 김씨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았다. 은행 담당자는 "바오디르가 원본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사본만 받았다"고 답했다.


법인카드로 7억 4000만 원 빼돌려


대출받은 돈은 법인카드로 이체됐다. 카드 내역을 확인하자 밀가루, 설탕 등 통신 사업과 무관한 물품 구매 내역만 가득했다. 영수증도 계약서도 세금 처리도 없었다. 100여 차례에 걸쳐 소액으로 나눠 현금화한 것으로 추정됐다.

회계 감사 보고서에는 법인카드로 지출된 총액이 6억1965만5000숨(우즈베키스탄 화폐, 약 7억4000만 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감사인은 "구매된 물품의 실물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적었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제 수준을 고려하면 이는 한국 돈으로 30억~40억 원 상당의 체감 가치다. 바오디르는 이 돈으로 '블랙벨리'라는 수입 식품 매장까지 차렸다.


뇌물 자백과 허위 제조시설 등록


바오디르는 변호사 앞에서 자백했다.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협동조합 거래소에 5000달러, 1만 달러씩 뇌물을 줬다." 협동조합 거래소는 한국의 조달청과 같은 정부 기관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제조시설 허가였다. A텔레콤의 공장 주소로 등록된 곳은 대형 공장이 아니라 월 10시간만 사용하는 공유오피스였다. 바오디르는 이곳을 연간 1600만 개의 심카드를 생산하는 대형 공장으로 허위 등록하고 제조기업 면허를 받았다.

허가 문서에는 2~3층 규모의 거대한 건물 사진과 생산 설비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실제로는 창고도 장비도 없었다.


5번의 수사, 5번의 무혐의


김씨는 2024년 8월 지역 경찰에 고소했다. 4일 만에 사건이 종결됐다. 제대로 된 조사도 없었다. 종결 사유는 단 한 줄, "범죄 구성 요건이 되지 않는다."

한국 대사관이 공정한 수사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항소로 사건이 재개됐지만 김씨를 조사조차 하지 않고 또 종결됐다. 민원을 넣어야만 종결 사실을 알 수 있었다.

2년간 5차례 수사가 시작됐지만 5번 모두 무혐의로 끝났다. 수사관은 "압력이 들어와서 사건을 덮을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경찰과 검찰은 서로에게 사건을 떠넘기는 핑퐁 게임만 반복했다.

네 번째 수사 때는 상황이 달라 보였다. 수사관이 김씨를 두 번 조사하고 필적 감정까지 의뢰했다. 한 달 넘게 기다린 끝에 수사관을 찾아가자 "감정 결과가 나왔고 형사 사건 개시를 요청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도 거짓이었다. 변호사가 감정 결과서와 요청서를 달라고 하자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민원을 넣자 그제야 "8월 30일에 이미 종결했다"는 답변이 왔다. 한 달간 김씨를 속인 것이었다.


"전임 검찰총장 조카라서 눈치 보나"


김씨는 바오디르가 전임 검찰총장의 조카라는 말을 들었다. 수사관들이 사건을 묻으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변호사도 "이건 법적 문제가 아니라 권력 문제"라고 했다.

감정이 북받친 김씨는 목소리를 높였다. "법대로만 해주면 됩니다. 한국인이 잘못하면 한국인도 벌받고, 우즈벡인이 잘못하면 우즈벡인도 벌받게요. 지금 제 나이에 한국에서 다시 일할 수 없습니다. 큰애는 대학생, 둘째는 고등학생인데 뒷바라지를 못했습니다."


대사관 공한에도 수개월째 무응답


한국 대사관은 2025년 10월 30일 우즈베키스탄 외교부에 공식 공한을 보냈다. "신속하고 공정한 수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조하고 진행 상황을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두 달이 지났지만 답변은 없다.

12월 10일에는 영사가 우즈베키스탄 대검찰청 국제협력국을 직접 방문했다. 2년간의 사건 경위와 증거 자료를 전달하며 오랜 시간 면담했다. 상대측은 "곧 연락하겠다"고 했지만 역시 소식이 없다.

김씨는 대사관 영사에게 검찰총장 면담을 요청했다. 영사는 "내정 간섭 여지가 있어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이라며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외교부는 "담당자 외근 중"


외교부 중앙아시아과에 전화했다. 담당자는 "외근 중"이었다. 돌아오면 전화하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기자가 물었다. "구조적 문제를 인지하고 있나요?" 담당자는 "제가 우즈베키스탄 담당이 아니어서 정확히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답했다.

외교부 언론담당관실에 질의서를 보냈다. 우즈베키스탄 당국이 2년 넘게 사건을 방치하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취할 외교적·법적 조치가 무엇인지 물었다. 답변은 오지 않았다.

주한 우즈베키스탄 대사관에도 질의서를 보냈다. "관계 기관 검토가 필요해 시간이 소요된다. 별도로 연락드리겠다"는 답장만 왔다.


"100번 찾아가도 똑같다"…반복되는 한국인 피해


또 다른 피해자가 증언했다. "100번 이상 찾아갔어요. 사건 조사를 제대로 하라고 불만을 제기하면 취소하고 다른 부서로 돌립니다. 그리고 종결해버려요. 이 반복입니다."

이 피해자는 12만 달러를 투자했다가 사기를 당했다. 우즈베키스탄에 학교를 세우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현지 학교를 방문해 한국어를 배우는 아이들을 보고 감동받았다. 국어사전과 동화책을 갖다 주고 급식 기계도 구상했다.

상대는 "땅과 하드웨어는 우리가 제공할 테니 시스템만 만들어달라"고 했다.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학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는 그냥 돈 조금 있는 어리석은 바보로밖에 안 보였겠죠."

이 피해자는 영사가 세 번이나 찾아가 항의했지만 결국 무혐의로 종결됐다고 했다. "외교의 구조적 한계입니다. 형사 수사와 사법 판단은 상대국 주권이잖아요. 영사님들이 막 따지고 문의해도 '알았다' 하고 끝입니다."

피해자는 한국인을 노린 사기에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서 1억2억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 제한적이잖아요. 여기는 월급이 15만원 30만 원이니까 뭔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몇 배 더 어렵습니다."

그는 우즈베키스탄 사기 수법의 패턴을 설명했다. "패턴은 똑같습니다. 해결을 안 합니다. 지쳐서 돌아갈 때까지 시간만 잡아먹습니다."

피해자는 대한민국 정부에 요구했다. "이 사안을 ISDS(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제도) 검토 대상으로 공식 분류해주십시오.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피해자가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은 상호투자보호협정을 맺고 있다. 이 협정에는 개인도 투자자 범위에 포함된다. 하지만 외교부는 "우리 소관이 아니다"라고 답했고, 법무부는 "개인이 해봤자 소용없다"고 했다.

김씨도 이에 동의했다. "ISDS는 론스타 같은 대기업이 하는 겁니다. 수백억 단위고 변호사 비용도 엄청납니다. 개인은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정부가 시스템을 만들어주면 됩니다. 신고해서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게요."


캄보디아 취업사기엔 즉각 대응했는데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0월 국무회의에서 캄보디아 취업사기를 언급하며 "국민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게 정부의 가장 큰 책임"이라고 했다. 캄보디아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코리아 전담반' 운영에 합의했다.

대통령실 대변인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피해를 주면 그 이상을 잃는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겠다"고 강조했다.

거액 피해를 당하고 몇 년째 방치된 한국인들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대사관이 보낸 공한이 수개월째 무시당하고, 영사가 직접 면담해 약속을 받았지만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다음 조치는 무엇인가.

해외에서 피해를 당한 국민들을 위해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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