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트럼프 유가 약발, 한 번 먹히고 끝났다
3월 23일 "협상 중" 한마디에 15달러 급락하던 시장, 4월 1일 "휴전 요청"에는 무반응
3/23 트럼프 "이란과 대화" 허위 발표 → 브렌트유 장중 15달러 급락, 이란 즉각 부인
4/1 "이란 대통령 휴전 요청" 재시도 → 유가 무반응, CNN "속임수에 지친 시장"
한국 유가상한제 비용 10조1000억원…같은 기간 국제 경유가는 오히려 6.8% 상승
무디스 "전쟁 전 유가 복귀, 수년간 불가능"…트럼프 남은 선택지 둘 다 유가 상승 방향
지난 3월 23일, 트럼프가 자신의 SNS 트루스소셜에 "이란과 생산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올리자 브렌트유가 장중 15달러 빠졌다. 9일 뒤, 거의 같은 글을 올렸다. 시장은 꿈쩍도 안 했다.
거짓 협상 발표, 처음엔 먹혔다
전쟁을 시작한 건 트럼프인데 기름값 폭탄은 미국 유권자가 맞았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막자 미국 주유소 휘발유가 갤런당 4달러를 넘겼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처음이다. 내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의석을 깎을 수 있는 숫자다.
3월 23일 오전 7시 5분(미 동부시간)에 올라온 그 글은 거짓이었다. 실제로 이란과 대화한 적이 없었다. 이란 외교부 대변인 에스마일 바게이는 즉각 "미국과의 직접 협상은 없다"고 반박했다. 이란 의회의장 갈리바프는 트럼프의 발언이 "유가·금융시장 조작 목적"이라고 지목했다.
하지만 시장은 이란의 반박이 나오기 전에 먼저 움직였다. 거짓말 한마디에 브렌트유가 배럴당 107달러에서 91달러까지 떨어졌다.
브렌트유 영국 북해에서 생산되는 원유. 전 세계 원유 거래의 약 3분의 2가 브렌트유를 기준으로 가격이 매겨진다. 뉴스에서 '국제유가'라고 하면 보통 이 가격이다.
WTI 미국 텍사스에서 생산되는 원유. 미국 국내 수급을 반영한다. 미국은 자체 생산량이 많아 브렌트유보다 보통 싸다.
두바이유 한국이 실제로 수입하는 중동산 원유의 기준 가격. 한국석유공사 오피넷이 쓰는 수치가 두바이유다.
석유는 글로벌 단일 시장에서 가격이 정해진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혀 전 세계 석유 공급의 20%가 묶이면, 나머지 80%를 놓고 모든 나라가 경쟁한다. 미국산 원유도 이 시장에서 거래된다.
미국 정유사는 텍사스에서 뽑은 원유를 국내에 싸게 팔 의무가 없다. 글로벌 시장에서 더 비싸게 팔 수 있으면 수출한다. 국내 공급이 줄고 가격이 오른다. 트럼프는 대국민 연설에서 "미국은 자체 석유가 풍부해서 괜찮다"고 했지만, 실제로 미국 주유소 휘발유는 갤런당 4달러를 넘었다.
9일 뒤, 같은 수법은 안 통했다
4월 1일, 트럼프는 같은 카드를 꺼냈다. "이란의 새 정권 대통령이 미국에 휴전을 요청했다." 이란 외교부는 이번에도 "완전히 거짓이고 근거 없다"고 반박했다.
달랐던 건 시장이다. 9일 전에는 트럼프 글 하나에 15달러가 빠졌는데, 이번에는 꿈쩍도 안 했다. CNN은 4월 2일 보도에서 "며칠간의 속임수에 지친 유가 시장이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유라시아그룹 이란·에너지 분석가 그레고리 브루는 CNN에 "트럼프가 2주째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지만, 전쟁을 계속하면서 이란도 속지 않는 이상 그의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한국시간 4월 2일 오전, 트럼프는 대국민 연설에서 "전쟁이 거의 끝났다"고 선언하면서 동시에 폭격 강화를 예고했다. 시장은 "평화" 쪽은 무시하고 "폭격 강화" 쪽에만 반응했다. 그날 밤(미 동부시간 4월 2일) 브렌트유 6월물은 7.78% 급등해 배럴당 109.03달러로 마감했다.
정리하면 이렇다. 트럼프가 "평화"를 말해도 시장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전쟁"을 말하면 즉각 반응한다. 기름값을 내릴 수단은 사라졌고, 올릴 수단만 남았다.
트럼프가 입으로 유가를 누르는 수단은 소진됐다.
10조원짜리 유가상한제
한국은 원유의 70.7%를 중동에서 수입한다. 그 가운데 65%가 호르무즈 해협을 지난다. 국제 기름값이 오르면 한국 주유소 가격도 따라 오른다.
실제로 올랐다. 한국석유공사 오피넷에 따르면 3월 2주 전국 주유소 휘발유 평균가는 리터당 1901.6원까지 치솟았다. 전쟁 직전(1691.2원)보다 210원 넘게 오른 수치다.
정부가 3월 13일 유가상한제를 시행한 뒤 주유소 가격은 3월 4주 1819.2원까지 내려왔다. 기름값이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같은 기간 국제 경유 가격은 배럴당 207.1달러에서 221.2달러로 오히려 올랐다. 국내 가격이 내려간 건 시장이 안정돼서가 아니다. 정부가 유가상한제로 국제유가 상승분이 소비자에게 전가되는 것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비용은 세금에서 나온다. 정부가 3월 31일 편성한 전쟁추경 26조2000억원 가운데 '고유가 부담 완화'에 10조1000억원이 배정됐다. 유류비·교통비 절감에만 5조1000억원이 잡혔다. 정유사가 원가 이하로 공급하면 그 차액을 정부 재정으로 메워주는 구조다.
산업통상자원부 문신학 차관은 3월 20일 CBS 라디오에서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양해 구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 보전금을 받는 정유사들은 유가 담합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3월 29일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했고 검찰도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담합이 사실이라면 정부가 메워주는 '손실'의 계산 근거 자체가 흔들린다.
기름값, 언제 내려가나
트럼프가 입으로 기름값을 누르는 수단을 잃은 이상, 국제 기름값이 내려갈 가능성은 낮다. 트럼프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인데, 둘 다 기름값을 올리는 방향이다.
하나는 호르무즈 해협을 안 열고 철수하는 것이다. 이 경우 세계 석유 공급의 5분의 1에 대한 통제권이 이란으로 넘어간다. 에너지 분석가들은 이 시나리오에서 유가가 전쟁 이후에도 배럴당 90달러 아래로 내려오기 어렵다고 본다.
다른 하나는 이란 에너지 인프라 폭격이다. 트럼프는 4월 3일 "다리가 다음이고 그다음은 발전소"라고 위협했다. 이 경우 기름 부족이 더 심해진다.
인터캐피털에너지 설립자 겸 대표 알베르토 벨로린은 BBC에 "정상 복귀가 수주가 아니라 수개월 뒤"라고 말했다. 무디스 수석 이코노미스트 마크 잔디는 CNN에 "전쟁 전 기름값으로 돌아가는 건 올해는 물론 아마 몇 년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보유한 비축유는 약 2억 배럴, 208일치로 알려져 있다. 문신학 차관은 이 수치에 대해서도 "평시 기준으로 하면 208일이 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최신뉴스
여러분의 회비는 권력감시와 사법정의, 그리고 사회적 약자 보호 등을 위한 취재 및 제작에 사용되며, 뉴탐사가 우리사회 기득권을 견제할 수 있는 언론으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뉴탐사 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