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사
지귀연, 노상원 수첩 빼주고 윤석열 살렸다…내란 옹호한 윤상현, 종조부는 독립군 잡던 친일 경찰
장동혁 '불효자의 눈물' 짜낸 노모 시골집, 등기도 건축물 대장도 없는 무허가 건물…재산 신고 누락까지 3중 속임수
12.3 내란의 우두머리 윤석열에 대해 지귀연 재판부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 겉으로는 중형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지귀연 재판부가 윤석열을 살려준 판결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같은 날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불효자는 웁니다' 게시물이 3중 속임수였던 사실이 드러났고, 내란의 인간 방패를 자처했던 윤상현 의원의 종조부가 종로경찰서장 출신 악질 친일파였다는 사실도 재조명됐다.
노상원 수첩을 빼주고, 사형의 문을 닫다
지귀연 재판부는 공수처의 수사 권한을 인정하고 내란죄 유죄를 선고했다. 여기까지는 다행이었다. 그러나 결정적 증거인 노상원 수첩을 빼줬다. "작성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고, 필기 형태가 조악하며, 보관 장소와 방법에 비춰 중요한 사항이 담긴 수첩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다"는 이유였다.
수첩에는 뉴탐사를 포함한 '더탐사 일당' 살생부와 구체적인 계엄 실행 계획이 적혀 있었다. 이미 퇴역한 예비역 장군에 불과한 노상원이 자신의 명령을 수행할 군인들을 선발하고, 탐사 언론인까지 적시한 살생부를 작성했다. 국정 최고 책임자와의 연계 없이는 불가능한 내용이다. 수첩에 '더탐사 일당'이라고 적혀 있다는 점은 뉴탐사가 더탐사에서 독립한 2023년 10월 이전에 작성됐다는 근거가 된다. 같은 시기에 3대 사령관이 전격 교체되고 문상호 정보사령관이 임명됐다.
노상원 수첩이 인정됐다면 윤석열의 내란은 즉흥적 폭발이 아니라 최소 1년 이상 치밀하게 기획된 쿠데타가 된다. 사형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귀연 재판부는 수첩을 빼줌으로써 사형의 문을 닫았고, 동시에 양형에서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감경 사유를 만들어냈다. 수첩을 부인한 것이 단순한 증거 판단이 아니라 양형 설계의 포석이었던 셈이다.
시민이 막은 내란이 윤석열의 감경 사유가 됐다
양형에서 지귀연 재판부가 나열한 감경 사유는 창의적이었다. "물리력 행사를 최대한 자제시키려 한 사정이 보인다", "대부분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아무런 범죄 전력이 없다", "현재 65세의 비교적 고령이다". 감경 사유 하나하나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물리력 자제는 윤석열의 의지가 아니라 현장 지휘관의 판단이었다. 특전사 장교들이 실탄을 지참했다는 증언도 있었지만, 실탄 지급 보류는 현장 군인들의 소극적 대응 때문이었다. 계획 실패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저항과 국회의원들의 담 넘기가 만들어낸 결과다.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내란을 저지한 행위가 윤석열의 형량을 깎아주는 데 쓰였다. 내란이 성공했다면 지귀연 판사는 오히려 시민들을 상대로 판결을 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65세를 "비교적 고령"이라고 표현한 것도 시대착오적이고, "범죄 전력이 없다"는 것은 법의 특권지대에서 살아온 방증일 수 있다.
감경 사유가 이렇게 쌓이자 법정에서는 유기징역이 선고될 것이라는 체념이 퍼졌다. 윤석열 역시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무기징역이 나왔다. 민주당이 재판 소원 제도, 대법관 증원, 법원 행정처 폐지 등 사법개혁 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윤석열을 봐주는 판결을 내렸다면 사법개혁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사법부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윤석열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되, 수첩을 빼주고 감경 사유를 잔뜩 깔아놓아 2심에서 형량이 내려갈 여지를 열어둔 것 아니냐는 의심이다.
선고 직후 현장에서 만난 시민은 "나이가 이제 겨우 60이 넘었는데 뭐가 나이가 많냐. 나는 10살 가까이 더 많은데 계속 고생하고 있다"며 분노했다. "국회에서 제대로 일을 안 해서 이따위 일이 생기는 것"이라며 "정청래는 합당이나 신경 쓸 게 아니라 내란 청산에 집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회 경비대장 목현태가 12년 구형에 3년을 선고받은 것도 논란이다. 계엄 해제 의결 이후에도 시민들의 국회 진입을 막았고, 2차 헬기 투입 시도의 중심에 있었다.
장동혁의 3중 속임수, 무허가 건물로 다주택자 눈물 짜내
장동혁 대표는 설 연휴에 페이스북에 흑백 사진을 올렸다. 95세 노모가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시골집 앞에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이번에 부모님 방문했더니 다 팔아야지. 이 집 없애려면 내가 얼른 죽어야지. 에휴." 이재명 대통령의 다주택자 겨냥 부동산 정책을 공격하는 데 쓴 감성 마케팅이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낡은 집 뒤쪽에 기와 지붕이 보인다. 김은도 PD가 현장을 직접 방문한 결과, 뒤편에 샤시로 마루까지 마감된 기와집이 있었다. 앞쪽 슬레이트 건물은 외양간이나 창고로 쓰였던 옛 건물로 사람이 거주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노모는 뒤쪽 기와집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토지 등기부를 확인하니 토지 등기만 있고 건물 등기가 없었다. 건축물 대장도 존재하지 않았다. 보령시청 담당자도 "건축물 대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인했다. 건축법에 따르면 2006년 5월 8일 이전에 건축된 연면적 200제곱미터 미만, 2층 이하 농촌 지역 건물은 허가 없이 건축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이후에 증개축을 했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 현장에서 확인된 최신형 샤시와 이중창 구조는 2006년 이전 건축물의 모습과 거리가 있다. 건축물 대장도 등기도 없는 건물은 다주택으로 카운트되지 않는다. 소유권 이전 자체가 불가능하다. 노모가 저 집을 팔아야 할 이유도, 나가야 할 이유도 없다.
왜 올해 사진이 아니라 2022년 사진을 올렸을까. 눈이 오지 않았던 올해 명절에 눈 쓸고 있는 사진이 등장한 이유가 있었다. 취재 결과, 2022년 9월 20일 배우자 명의로 같은 대천동의 흥화 아파트를 매입한 사실이 확인됐다. 노모의 거주를 위한 아파트로 추정된다. 2022년 이후 노모가 아파트로 이사했을 가능성이 높고, 지금은 시골집에 살지 않기 때문에 연출이 불가능해 3년 전 사진을 꺼내 쓴 것으로 보인다.

속임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노모가 살던 토지를 담보로 배우자 명의 농협 대출 약 4천만원을 받은 사실이 확인됐다. 2018년 8월에 대출받아 2025년에야 근저당이 말소됐다. 2018년은 배우자가 기획부동산을 통해 서산 대산 땅 투기를 한 것으로 의심받는 시기와 겹친다. 이 채무는 2022년, 2024년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 재산 신고에 빠져 있었다. 자동차 리스 잔여금 하나만 기재하고 농협 채무는 누락했다. 2000년부터 재산 신고 내역을 쭉 확인한 결과, 한 번도 이 농협 채무를 신고한 적이 없었다. 채무 신고 누락은 경우에 따라 당선 무효형이 선고될 수 있는 사안이다. 무허가 건물 동원, 3년 전 사진 연출, 재산 신고 누락. 장동혁 대표의 3중 속임수다.

윤상현의 종조부 윤종화, 일제에 견마지로 충성을 맹세하다
윤석열 내란 선고가 내려진 날, 1년간 내란의 인간 방패를 자처했던 윤상현 의원의 종조부 윤종화의 친일 행적이 다시 조명됐다. 충남 청양 출신 칠원 윤씨 윤종화는 규슈제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33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필기에 3등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구두 면접에서 탈락한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의도적으로 떨어뜨려 한을 심어주고, 더 강력한 친일파로 키우려는 계산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이봉창 의사는 같은 시기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승진하지 못하자 독립투사의 길을 택했다. 윤종화는 정반대였다. 1934년 최종 합격 후 "견마지로(개와 말의 수고로)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937년 창녕군수로 부임해 쌀 통제 조합장을 겸하며 수탈에 앞장섰고, 군용물자 조달과 공출, 국방헌금 모금을 담당했다. 조선인이라는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같은 민족을 더 가혹하게 수탈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1943년 9월 종로경찰서장에 취임하며 매일신보에 기고했다. "종로는 반도의 중추지대이고, 반도 민심의 동향을 결정하는 근원지다. 경찰관은 민중의 선두에 서서 계몽과 지도를 해야 한다."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 탄압의 상징이었다. 고등계 형사 비율이 높았고, 김상옥 의사가 폭탄을 던진 곳이기도 하다. 취임 두 달 만에 고등관 4등으로 초고속 승진하고, 조선인 최초로 황해도 경찰부장에 보임됐다.
윤종화가 황해도 경찰부장으로 재직하던 1945년 1월, 항일 시인 이육사가 중국 베이징 감옥에서 고문 끝에 순국했다. 황해도는 중국과의 정보 교류에서 핵심적인 위치였다. 윤종화가 잔을 들고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이육사는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해방 후 소련군에 체포된 윤종화는 자신을 일본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전쟁포로 대우를 요구했다. 하바로프스크까지 이송된 것이 마지막 행적이다. 윤종화의 아들 윤석순은 전두환 정권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지냈고, 그 조카가 윤상현이다. 전두환의 큰딸과 결혼했다가 이혼한 인물. 입대 당일 전역이라는 병역 이력의 소유자. 선고 이틀 전 갑자기 대국민 사과로 태세를 전환했지만, 윤석열이 죽은 주식이라고 판단하고 종목을 갈아탄 것으로 읽힌다.
뉴탐사 취재진이 인천 동구 윤상현 의원 지역 사무실을 방문해 종조부의 친일 행적에 대해 물었다. 직원은 "처음 듣는다"고 답했다. 윤상현 의원 본인은 이 사안에 대해 언급 자체를 하지 않고 있다. 사무실 벽에는 '신의와 보은'이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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